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존 만지로 (문단 편집) === 타국 생활 === 결국 귀국하지 못한 채 만지로 등을 태운 존 하울랜드호는 5개월 후 다음 기항지인 [[하와이]]에 도착한다. 하와이의 [[호놀룰루]]항에 기항하기까지 약 반년 동안 만지로는 특유의 감과 영리함으로 미국의 앞선 포경기술, 언어, 습관 등을 익히려고 열심히 일했다. 지식욕이 왕성하고 흡수율도 높았던 만지로는 언어와 습관, 고래잡이 일 등을 조금씩 익혀가면서 [[미국인]] 선원들과 친숙해졌다. 윗필드 선장은 매사를 열심히 살아가는 만지로에게 호감을 가졌고, 다른 선원들도 만지로를 동료로 맞아들이며 무척 귀여워했다. 이후 함께 구출된 동료들은 배의 기착지인 [[하와이]][* 하와이의 선교사들에게 맡겨졌다.]에 남았지만, '''만지로는 배에 있던 [[세계]][[지도]]를 보고는 모험을 희망했고 선장 윌리엄 윗필드도 그를 마음에 들어하여 포경 선원으로 그를 거둔 후 포경선의 선명을 따 John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만지로는 포경선 동료들로부터도 용기 있고 적극적인 일처리와 성실하고 붙임성 있는 성격으로 모두와 친숙해졌고 '존 만(John Mung)'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게 됐다.[* 만지로라는 이름을 줄여 만 혹은 존 만으로 불리게 됐다.] 이때부터 그는 [[알파벳]]을 배운다. 일본에서는 서당에도 다녀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읽고 쓸 수 없었다. 돛대에 올라 고래 망을 보고 발견하면 'Sea Blows'라고 영어로 외쳤다. 그런 소년에게 선원들은 적극적으로 영어를 가르쳤다. 이후 만지로의 머리가 좋은 것을 마음에 들어하고 있던 윗필드 선장은 "미국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않을래?"라고 권유한다. 만지로는 이 질문에 바로 "꼭 데려가 주세요"라고 말한다. 이러한 역경하에서의 솔직하고 적극적인 태도가, 만지로의 이후의 인생을 개척해 가게 된다. 윗필드 선장과의 운명적이고 [[기적]]적인 만남으로 인해, 만지로의 삶은 앞으로 크게 달라지게 된다. 하와이를 출항한 존 하울랜드호는 곳곳에서 고래잡이를 계속하며 길버트 제도, [[괌]]섬에서 식량과 물을 보급, [[대만]] 근해를 거쳐 일본 근해로 들어간다. 일본으로부터 200~400km에서 포경을 계속해 목표 포획을 달성한 존 하울랜드호는 포경을 마치고 호놀룰루로 향했다. 그러나 강한 바람과 거센 파도로 호놀룰루에 기항하지 못하고 남동쪽으로 진로를 돌려 [[남미]] 최남단의 혼곶([[칠레]]의 곶), 즉 [[드레이크 해협]]을 경유해 미국으로 향했다. 존 하울랜드호는, 미국 동해안에서 북상, [[매사추세츠 주]]의 남단에 가까운 부저드만을 향해 항해하고 있다. 바다 저편으로 띠처럼 길고 납작한 육지가 어렴풋이 보였고 윗필드 선장이 손가락을 가리키며 만지로에게 자신의 고향 페어헤븐(Fairhaven)을 소개한다. 배는 더욱 만내로 북상하고 있다. 아크시넷 강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이 페어헤븐, 왼쪽이 뉴 베드포드(New Bedford)[* 당대 포경업을 다룬 소설 모비 딕에서는 주인공 이스마일과 키퀘그 일행이 출항하기 전에 찾는 예배당이 있는 도시로 등장한다.]였다. 이윽고 배는 세계 최대[* 만지로가 방문한 이 시기는 확실히 최전성기로, 양항을 합해 260척의 포경선을 가진 미국 최대의 포경 기지였다.]의 포경기지인 뉴 베드포드 항으로 귀항한다. 이 항해에서 존 하울랜드호가 가져온 [[고래기름]]통이 엄청 많았고 호놀룰루에서도 다른 편으로 보내왔다. 선장이 만지로를 데리고 세관 선주 사무실 등을 돌며 항해 사실을 보고하자 이번 항해는 대성공이라는 찬사가 모두에게 쏟아졌다. 관계처에 갈 때마다 윗필드 선장은 만지로를 모두에게 소개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ktymtskz.jpg|width=100%]]}}} || || {{{-1 {{{#ffffff ▲ '''소년기를 보낸 윗필드 선장의 집.'''}}}}}} || 선장으로부터 소개받은 사람들은 일본이라는 외딴 나라에서 미국 동해기슭까지 온 소년 만지로에게 호기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만지로도 이 무렵에는 일상적인 인사나 영어회화에는 상당한 기량을 기르고 말하는 데 불편함이 없었다. 이때가 1843년 5월 7일의 일이다. 만지로는 윗필드 선장의 [[양자]]처럼 함께 살았고, 만지로를 그의 가족이 있는 [[매사추세츠]] 페어헤븐에 데려가 옥스포드 스트리트 올드 스톤 스쿨에서 선생 제임스 아킨에게 의탁시켰다. 일본인 [[최초]] 미국 거주자이자 일본 최초 미국 [[유학]] 1호가 탄생한 순간이다.[* 일본인 최초로 미국땅을 밟은 사람은 아니다. 1614년 [[하세쿠라 츠네나가]]가 식민지였던 아메리카 대륙을 방문했다. 다만, 이때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없었다.] 어린 만지로는 거기에서 [[영어]]와 [[수학]], [[측량]], 항해술 등을 3년동안 미국의 최신 교육으로 받았고, 만지로도 그에 부응해 학교에서 [[수석]]을 차지하는 등의 노력을 보였다. 이국의 생활에 필사적으로 익숙해지려는 만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성과로서 이후 만지로는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영어 회화 교재 '영미대화첩경(英米対話捷径)'을 저술하기도 했다. 당시 만지로는 마을에서 [[인종차별]]을 당하기도 했지만 만지로의 학교 친구들은 대체로 그를 받아들였다. 다만 그들의 부모들 중 일부는 타지에서 온 동양인을 환영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만지로는 미국에서 나름 알찬 나날을 보냈고, 그는 공부하면서 '자유, 평등, 박애 정신'을 배우며 [[민주주의]]를 터득했다. 만지로가 살았던 페어헤븐은 뉴 베드포드에 인접한 마을로 항해술 등의 전문학교가 있었다. 윗필드 선장은 만지로의 [[능력]]과 [[의욕]]을 높이 샀다. 선장은 만지로에게 페어헤븐의 항해전문학교(아카데미)에 다니며 본격적인 기술을 배우라고 권한다. 해가 바뀌어 1844년 만지로는 17살이 되었다. 그해 2월 만지로는 아카데미([[전문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페어헤븐에서는 이 전문학교를 파트렛 아카데미라고 불렀다. 현재의 중고등교육학교라고 보면 된다. 학교의 이름은 루이스 바틀렛 스쿨이다. 초등학교와 달리 1시간을 수업하고 2, 3시간 [[자습]]해야 할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영어, [[문학]], [[역사]], [[수학]], 측량술, 항해술 등 내용은 매우 고급이어서 만지로는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이때 같이 공부했던 야콥 트립이라고 하는 학우의 기록에는 "만지로는 반에서 항상 [[수석]]이며, 학습에 완전하게 몰두하고 있었다. 숫기가 없고 태도는 언제나 조용했으며, 공손했다"고 적혀있다. 이 이야기는 1916년 1월 발행의 현지 신문지에 게재되고 있다. 또한 만지로는 미국의 국가체제와 [[사회]], [[법]], 풍토, 그리고 미국인들 개개인을 관찰하기도 했다. 당시의 학우들이 말하고 있듯이 '만지로는, 높은 의욕과 배우려고 하는 마음이 왕성하고, 뭐든지 척척 흡수해 버린 소년'이기도 했다. 당시 선장은 만지로를 소속된 [[개신교]] [[교회]] 주일학교에 들어가게 하려고 했다. 동양인이었던 만지로는 당연히 거절당한다. 또 교회 사람들은 동양인이었던 그에게 "[[니그로]] 좌석(negro pew)"에 앉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다음 일요일도 다른 교회에 데려가지만 거기서도 거절당한다. 결국 만지로를 받아 준 교회는, [[유니테리언]] 교회였다.[* 현재는 노스웨스트 해양학 전문 양성소 학원으로 바꼈다. 정면 입구 앞에 세워진 기념비는 만지로와 윗필드 선장의 우정을 상징하도록 학원장이 설계했다.] 만지로는 윗필드 선장에게 친자식처럼 소중히 여겨져, 그에게 은혜도 느끼고 있었지만[* 만지로의 편지 중에서 The great God을 제외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라고 선장을 회고했다.], 가슴 한편에서는 [[향수병]]으로 인해 [[고향]](특히 어머니에게)에 대한 생각이 계속 들었다고 한다. 그런 때에 선원 동료는 만지로에게 '너의 나라는 터무니없이 곤란한 인간을 돕지 않는다'라고 일본에 대한 [[분노]]를 듣게 된다. 이때부터 만지로는 언제까지나 선장의 호의에 의지하고 있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게 되며 [[자립]]을 결심한다. 만지로는 어느 날 선장 부인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동의를 얻는다. 1845년 2월부터 이웃 마을 뉴 베드포드의 오케야에 입주해 일하게 되었다. 만지로는 더부살이를 하며, 고래 기름을 담는 통 만들기의 기본을 배운다. 고된 일로 식사도 세 끼 모두 마른 빵으로 만지로도 [[영양실조]] 상태에 빠져 결국 쓰러지기도 했다고 한다. 이때 나무통 만들기의 솜씨를 연마해 가기도 했다. 나무통은 고래기름을 담기 위한 것으로, 포경선의 뱃사람이 되어 도움이 되는 수행이 된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johnmung_fes7s.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johnmung_fes13s.jpg|width=100%]]}}} || ||<-2> {{{-1 {{{#ffffff ▲ '''옥스포드 스트리트 올드 스톤 스쿨[* 방 하나뿐인 교실에서 상급생, 하급생, 동석으로 공부했다.] & 루이스 바틀렛 스쿨'''}}}}}} || 만지로는 미국의 고등교육을 배워 기초학력을 키워갔다. 영어, 수학, 측량, 항해술, 조선기술 등 폭넓게 배운 것은 만지로의 능력과 인격 양성에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미국에서 받은 고등교육이, 그 후의 항해에도 활용되어 체험해, 미국 뿐만 아니라, 지식의 폭이나 견문등이 쇄국 시대의 일본에 활용되었다. 근대 일본의 국가 건설이나, 발전의 [[주춧돌]]이 되어 공헌하기도 했다. 만지로는 옥스포드 올드 스톤 스쿨을 졸업한 뒤 선장의 의견에 따라 항해사 양성학교인 루이스 바틀렛 스쿨에 17세에 입학하고, 학교에서 최첨단 포경기술, 항해기술, 조선기술 등을 익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다. 이때 만지로는 19살이었다. 루이스 바틀렛 스쿨을 졸업한 뒤에도 윗필드 선장의 [[농장]]에서 일하다 존 하울랜드 호에 승선해 있던 아이라 데이비스(Ira Davis)에게 항해 권유를 받는다. 당시 아이라 데이비스는 프랭클린호의 [[선장]]에 임명돼 있었다. 이때 윗필드 선장은 윌리엄 앤드 엘리자호로 2년 전에 외출하고 없었다. 큰 은혜를 입은 선장과 상의하지 않은 채 항해에 나서는 것이 부담스러웠다고 한다. 다행히 선장 부인이 만지로의 항해에 찬성하며 열심히 권했고, 만지로는 아이라 데이비스의 권유를 수락하고 포경선 프랭클린 호에 승선하기로 결정한다. 1846년 19세의 나이로 포경선 프랭클린 호에 선원으로 취직하여 [[매사추세츠]]에서부터 항해를 시작하였다. 만지로는 1846년 5월부터 1849년 9월까지 3년 4개월 동안 프랭클린호에 승선해 고래를 쫓아 [[대서양]], [[인도양]] 그리고 [[태평양]]을 항해한다. 그는 맨 처음 잔심부름을 하다가 Harpooner(작살 다루는 사람)로서 일했는데 1847년, 프랭클린 호가 [[하와이]]에 기착했을 때 만지로는 그와 함께 표류했었던 동료 토라에몬을 다시 볼 수 있었다. [[막부]]의 허락없이 국외에 나갔다는 것이 발각됐을 때 처벌 받을까봐 두려워 일본에 귀국하지 못하고 아직까지도 하와이에 남은 것이었다. 시게스케와 고에몽 형제는 전년 윗필드 선장이 호놀룰루에 와 일본 근해로 가는 포경선 플로리다호의 선장을 소개해줬다고 한다. 그래서 1846년 11월 두 사람은 플로리다호를 타고 호놀룰루를 떠났다. 1847년 11월 프랭클린호는 호놀룰루를 출항한다. 출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데이비스 선장의 언동이 갑자기 돌변한다. 원래 포경선에 어울리지 않게 온순한 성격의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툭하면 욕도 하고 폭력도 휘두르기 일쑤였다. 알고보니 [[정신병]]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8efe2cc00ac79311121887121431ccbd.webp|width=100%]]}}} || || {{{-1 {{{#ffffff ▲ '''포경선 프랭클린 호의 모형'''}}}}}} || 항해를 계속하다 보면 선장의 정신병 증세는 점점 악화돼 칼과 총까지 휘두르게 되었다. 만지로 등 프랭클린호 간부들은 협의 끝에 일시적으로 선장을 [[감금]]하기로 결정했다. 4월 하순 [[필리핀]] 앞바다에서 거센 폭풍우가 닥쳐 한때 좌초 침몰의 우려를 낳았지만 선원들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극복해 나갔다. 5월 하순에 필리핀 [[루손 섬]] [[마닐라]] 항에 기항한다. 이때 미국 [[영사관]]에 데이비스 선장의 상황을 설명하고 본국으로 송환해 줄 것을 의뢰했다고 한다. 이후 프랭클린호는 선장이 없자 후임자를 뽑는 전원 투표가 진행됐다. 개표 결과로 새 선장에는 일등 항해사인 에이킨이 선정됐고 만지로가 일등 항해사이자 부선장으로 선임됐다. 만지로가 선택된 이유는, 일에 대한 대처가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일등 항해사가 되기 위해서는 보통이라면 3~4회 항해와 9년에서 12년의 경험으로부터 선택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 항해로 만지로는 세계 여러 나라와 땅을 찾아다니며 다양한 경험을 쌓게 된다. 포경 활동도 순조롭게 진행돼 성과를 올리고 있다. 프랭클린호는 마닐라에서 데이비스 선장을 하선시킨 뒤 대만과 [[류큐]]를 따라 북상하다가 다시 일본 근해에서 고래잡이를 하다 괌으로 돌아온다. 약 1개월간 정박한 뒤 진로를 남쪽으로 잡고 뉴아일랜드 섬([[파푸아뉴기니]]) 부근을 거쳐 [[스람 섬]]에 기항한다. 배는 [[인도양]]을 서진해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돌아 1849년 8월 수천 통의 고래기름을 선창 가득 싣고 모항 뉴 베드포드로 귀항했다. 1849년, 만지로는 세계 일주를 마치고 메사추세츠에 돌아온 프랭클린 호에서 350달러의 보수를 받고 윗필드 선장을 오랜만에 만난다. 이후 만지로는 금을 캐서 귀국 자금을 구하기 위해 '''[[골드 러시]]에 참가'''하는 계획을 세운다. 1849년 캘리포니아 주에 일어난 골드러시에 만지로는 귀국 자금을 벌기 위해 테리라는 청년을 꾀어 제2의 고향인 페어헤븐을 출발해 간다. 1850년 5월 캘리포니아에 도착한 만지로 일행을 기다리는 노동은 더 가혹했다. 곡괭이와 삽을 들고 쉬지 않고 일했다. 처음엔 고용돼 [[광부]]로 일했고, 얼마 안 돼 독립적으로 파서 70여 일 일해 600달러를 벌었다. 이만큼 있으면 귀국 자금이 충분할 것이라며 채굴 도구 등을 테리에게 공짜로 주고 번 돈을 손에 쥐고 만지로는 얼른 산을 내려온다.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이 시기 그는 일본인 최초로 [[철도]], [[증기선]]을 타보고, 최초로 근대식 [[고래잡이|포경]]업에 종사한 인물로 기록되었다.[* 존 만지로의 10년간의 여정은 인터넷 존만지로 자료관 [[http://www.johnmung.info/john_kouro.htm|참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